라오스 기행 5편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Vientiane)의 고대 불교사원'

사용자 삽입 이미지뒤에 보이는 건축물이 바로, 프랑스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여 만든 독립기념탑, 빠뚜싸이(Patousai)


방비엥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남쪽으로 4시간 여를 달려 라오스의 수도, 비엔티안에 도착했다.
막차로 도착하니 버스터미널이 휑~허다. 다행히 버스터미널을 서성이는 톡톡이가 있어 흥정을 하고 시내로 들어선다.
론리플랜을 보고 점찍어두었던 숙소는 이미 만원.. 서너 군데를 더 돌아보아도 모두 방이 없다고 한다.
늦은 시간에 낯선 곳, 이 상황에서 믿을 수 있는 건 사람뿐. 톡톡이에 몸을 실고 헤메이다 간신히 허름한 게스트하우스에 짐을 푼다.

이틑날 아침, 눈을 뜨자마자 체크아웃을 하고 거리로 나선다.
오후에 비행기로 떠나야 하므로 비엔티안에서 유명하다는 고대 불교사원을 중점적으로 둘러보고자 한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중심에 있는 비엔티안(Vientiane)은 고난했던 라오스 역사의 산증인과 같은 도시이다.

라오족은 14세기 초, 화 훔이 루앙 프라방에 라오스 최초의 통일 왕국인 란쌍(Lan Xang: 백만 마리 코끼리)왕국을 건국하기 전까지
여러 개의 므엉(Muong, 도시)단위로 살아가며 씨암(태국), 미얀마, 베트남, 크메르 등 주변국의 통치를 받았다.

1536년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우던 란쌍 왕국이 루앙프라방에서 위앙짠(비엔티안)으로 왕궁을 옮겼으나
18세기 초 왕위 계승 문제로 왕실간의 다툼이 발생하였고 결국 위앙짠, 루앙 프라방, 참빠싹으로 다시 분열되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점령한 프랑스에 의해 오늘날의 라오스 국경이 그어지고, 비엔티안이 수도로 정해지며 식민지배를 받다가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인도차이나 반도에 진군한 일본군에 의해 1945년 3월 프랑스 세력이 무너지며 일시적으로 독립을 하게 된다.
하지만 같은 해 8월 일본군이 패망하면서 프랑스가 인도차이나 3국(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의 재지배를 위하여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을 일으키면서 다시 역사의 현장이 되었다.
인도차이나 전쟁 끝에 힘겹게 독립을 얻게 되지만, 전 세계를 지배하던 소련과 미국의 냉전 구도의 전유물로 이용당하며,
1975년 까이썬(Kaysone Phomvihane)을 중심으로 공산 정권이 수립되기 전까지 내전과 혼란에 휩싸인다.

이후 1991년 성문화된 헌법이 채택되었다. 헌법에 의하면 “모든 권력은 국민에 의한, 국민에 의해서 나온다.”고 명시되어 있으나
중국과 베트남의 경우처럼 LPRP이 정치권력을 완전히 독점하고 있는 폐쇄적 다원주의로,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처럼 다난했던 역사속에서 유럽과 아시아의 문화가 융화되며, 비엔티안은 인도차이나 3대 도시 중의 하나로 손꼽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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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에는 약 80개에 달하는 고대 불교사원이 있었으나, 씨암(태국)의 침공으로 현재는 20개의 사원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그 중에 비엔티안에서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사원, 왓 시 사켓(Wat Si Saket)을 먼저 찾아간다.



왓 시 사켓(Wat Si Saket)
 
왓 시 사켓은 비엔티안에서 현존하는 것 중에 가장 오래된 사원으로, 1818년에 아노봉왕(Anouvong)에 의해 건축되었다.
건축시에는 옛 왕궁의 앞뜰에 있었는데, 현재는 대통령궁의 앞에 위치하고 있다.
원래의 이름은 싸타싸핟사람(Satasahatsaram)인데, 왓 시 사켓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세기 초에는 매우 중요한 사원이었는데, 1828년 씨암(태국)의 침입과 1829년의 대화재로 많은 불상과 문화재가 사라졌다.
큰 불상을 포함한 몇 개의 불상과 공예품, 19세기 초의 공예가 잘 나타나 있는 120개의 석회석 불상만이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또한 왕의 후원을 받아서 제작한 금은 세공품, 다양한 사파이어 공예품 등을 전시하고 있으며, 이것은 모두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1924년에 첫 복원 공사가 시작되었고, 서고를 포함하여 1930년에 대규모의 개축공사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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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앙프라방의 왓 시 엥통(Wat Xieng Thong)처럼, 비엔티안에 오면 꼭 둘러봐야 하는 사원이라는 것을 증명하듯
아침부터 많은 사람들로 북적댄다. 사원을 둘러보다 방비엥의 트럭에서 눈인사만 했던 가족과 마주친다. 우연한 만남의 연속..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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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되어 색이 바래고 갈라진 기와를 켜켜이 이어 놓은 지붕에
지난한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묻어있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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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하지 아니하고 수수해서 더 끌리는 사원의 정문, 기둥, 처마
(내부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어서 담지 못했다.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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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왓 시 사켓의 백미는 석회암으로 만들어진 고대불상이라고 하는데, 내 시선을 끄는 것은 바로 이 기와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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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길 건너에 있는 호 파깨오(Haw Pha Kaew)로 가는 길에 만난 스님
라오스에서는 어디를 가든지, 주황법의를 입은 스님을 쉬이 만날 수 있다. 친구처럼 다정한 스님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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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 파깨오(Haw Pha Kaew)

1565년 란쌍 왕국의 후계자였던 셋타티랏(Setthathrat) 왕이 왕국의 상징이었던 에메랄드 불상을 안치하기 위해 지었다.
하지만 에메랄드 불상은 현재 시암(태국)의 침공 때 강탈당하여 방콕에 안치되어 있다.

오랜동안 라오스 란쌍 왕국의 절이었지만 현재는 호파캐오 박물관(Museum of Hophakaew)으로 바뀌어
불상을 비롯해 역사적·종교적 예술품(야자잎에 쓴 필사본, 크메르 비문 등)을 전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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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원에 새겨진 압사라(Apsara) 조각

캄보디아 및 베트남에서 '압사라 댄스'로 유명한 압사라는 캄보디아 앙코르 왓에 부조로 새겨져 있을만큼 전통이 오래된 것으로
고대 캄보이아 왕실에서 천상의 존재를 표현하는 신성한 임무를 지닌 자를 일컬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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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캐오 사원은 태국의 침략시에 파괴되어 이후에 시멘트 발림으로 복원, 증축하엿는데
복원 상태가 심히 좋지않고 귀중한 문화재들을 방치하듯 전시하고 있어, 보는 내내 마음이 편치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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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에서 가장 큰 청동불상을 모시고 있다는 옹투 사원(Wat Ongtu또는 Wat Ongteu)
을 찾아간다.
 
불상도 불상이지만, 그 앞에서 오랜 시간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두 처자가 인상적이다.
저들의 간절한 소망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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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투 사원은 라오스에서 손꼽히는 불교학교를 운영하고 있으며, 총무원을 두고 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사원 곳곳에서 스님들을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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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 치곤 소위 인상파, 싸아해 보인다. 하지만 역시나 다정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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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엔티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사원, 왓 시 므앙(Wat Si Muang)을 찾아간다.
명성 그대로, 다른 사원들보다 많은 사람들이 공양을 드리기 위해 오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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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왓 시므앙을 찾는 까닭은 바로 위에 '락 므앙(Lak Meuang, 도시의 기둥)' 때문이다.

사람들은 'Lak Meuang(도시의 기둥)'을 비에티안 수호자의 영혼이 깃든 곳이라고 믿고 있다.
1563년 셋타티랏(Setthathrat) 왕이 루앙프라방에서 비엔티안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새 사원의 터로 점찍었는데
그 자리에 고대 크메르 지역에서 가져온 돌로 건축물을 지은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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락 므앙 위에서 한발자욱도 움직이지 않고 명상 중인 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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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수 나무 아래 황금불상, 그리고 아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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